(8)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Aurelius 354.11,13-430.8.28)
가. 그의 생애
아루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독교 교회의 오랜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하고 강력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고대 그리스의 교부, 은총박사, 히포의 주교라는 명칭을 가지고 있다.
그는 북 아프리카의 타가스테에서 출생했다. 부친 파트리키우스는 이교도로서 로마제국의 관리로 있었다. 그러나 모친 모니카는 그리스도인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칼타고 대학에 유학하여 수사학을 배웠으나 방탕한 기질로 인하여 16-19세 까지 무질서 하고도 방종한 생활을 보냈다. 19세때 어머니의 동의 없이 미천한 여자와 동거생활을 하여 아들 하나를 낳았다. 그러나 왠지 육체적인 욕망과 이상의 틈바구니에서 고민 하였다. 그러던 중 새로운 계기가 찾아왔다. 373년에 그는 키케로가 쓴 <<Hortensius>>를 읽는 중 철학문제에 흥미를 갖게 된다. 그 후 곧 그는 마니교도가 되어 철저한 선악 이원론에 매력을 느끼고 악의 문제에 관한 자신의 번민을 해결하려고 했으며 아울러 그의 조직적인 우주론으로써 자기의 욕망을 채우려고 생각했다.
20세에 칼타고에서 돌아와 타가스테에서 그리고 다시 칼타고에서 수사학을 가르치다가 383년에 그는 처자를 데리고 친구와 함께 로마로 갔다. 여기서 마니교도인 친지를 만나 밀라노 대학에서 교수직을 얻었다. 그러나 어쩐지 마니교의 우주론에 의혹을 품기에 이르렀고 또한 영적 실재에 대한 철학적 인식을 소유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신관을 파악하지 못한채 신 아카데미파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의 회심에 꾸준한 노력과 결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을 어머니 모니카였다. 그는 어느날 밀라노 정원에서 거닐다가 “ tolle Lege" "집어들고 읽어라" 라는 어린아이의 음성을 들었다. 그는 그 길로 즉시 성서를 손에잡고 읽은 것이 롬13:13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이었다. 이때가 386년이었다. 이에 뜨거운 느낌을 갖고 드디어 밀라노 대학의 교수직을 박차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모친과 친구와 더불어 카시키아쿰에 도착, 여기서 한가하게 지내면서 반성과 토의와 나아갈 길을 모색하게 되었다. 드디어 387년 부활절에 아우구스티누스는 다시 밀라노에 가서 암브로시우스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후 모친의 별세로 마음의 허전함을 느낀채 고향인 타가스테로 돌아왔다.(388) 그리고 여기서 기도와 명상과 연구에 몰두했다. 그러다가 391년에 히포의 신부로 임명 받았고 394년에는 보좌 신부로 396년에는 단독으로 동교구를 지도하는 주교가 되어 34년간 별세 할때까지 봉직 하였다.
나. 그의 공적
하르낙은 “바울과 루터 사이에 교회는 아우구스티누스에 맞설만한 인물을 갖고 있지 않다”고 말한바 있다.
(이것은 그 사람의 공적이나 인기 문제가 아니고 그의 신학에 대한 영향력 결코 낡아지지 않는 중심신학의 힘이다.-정길생각-)
그는 비단 중세기에서만 아니라 오늘날에서도 서구의 정신과 동구의 정신을 망라하여 정신계에 생명과 발랄한 호흡을 불어넣은 것은 아우구스티누스의 힘이라고 볼수 있다.
그의 정신은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와 토마스 아 킴퍼스 에서도 살아 움직였다. 또한 카롤링 왕조시대의 개혁자와 위클리프, 후스 베셀에 이르기까지 개혁 정신을 불어넣은 사람이다. 르네상스와 루터에 이르기까지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향을 받지 않은자가 없었다. 로마교회의 아버지였지만 인문주의 자도 영웅처럼 존경한 교부였다는데 아무런 이의가 있을수 없다.
그의 사상은 대체로 교회의 신앙에다 철학적인 진리 내용을 첨가하여 더 풍성하게 하였고 사도시대 이후의 종교적인 여러 가지 개념을 하나의 신 개념하에서 통합 시키는 데 있었다. 우선 그는 마니교의 이원론적 세계관과 자유의지의 교훈을 통렬히 비판하고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404년까지) 그리고 칼타고의 도나투스파와의 논쟁을 통하여 성례전의 객관적인 역사는 이를 시행하는 자의 신앙과 도덕과는 무관계 하다는 점을 주장 백년간에 걸쳐 내려온 논쟁을 칼타고 종교회의에서 종결 시켰다. (411)
하르낙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은 마치 괴테의 <<파우스트>>에 비교할수 있다. 즉 살아있는 파우스트가 그려져 있다” 고 하였다. 그는 <<고백>>에서 "암브로시우스는 나에게 구약성서의 장애물을 제거해 주었다."고 하였다. 암브로 시우스의 성서석의의 희랍적인 방법은 그에게 큰 매력을 던져 주었다. 그러나 실은 그에게 있어서 석의 방법 보다는 그의 인격이 보다 더 큰 위력을 가지고 있다. 그는 <<고백>>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고백 형식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그 동기와 목적으로 썼다.
다. 그의 신학
<1>구원론
타락된 인간의 회복은 오직 은총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저 유명한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이 바로 ‘자연과 은총’ ‘자유와 은총’ 의 문제였다.
펠라기우스는 선과악을 선택할 수 있는 타고난 능력으로 인간은 하나님과의 조화된 상태에 이를수 있다고 하였다. 이른바 형식적 자유를 강조하였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만 가능하고 의지의 변화도 은총의 선물로 주어진다고 보았다. 그리고 인간회복도 은총에 의존 한다고 보았다. 결국 칼타고 회의에서 펠라기우스는 배척되고 아우구스티누스가 승리를 거두었다.(412) 또한 아우구스티누스는 은총을 불가항력적인 동시에 예정된 것이라고 보았다. 특히 아우구스티누스의 신 개념에 나타난 신 플라톤주의적 색채, 개인적인 종교적 체험, 은총의 독점적인 작용에 대한 인식 등은 모두 ‘예정’ 이라는 개념과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은총은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의지이다. 만일 은총이 인간에게 임하면 인간은 그것을 거역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의지를 무시하고 행하시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받아 들일수 있는 적절한 타임에 나타나신다?-정길생각-)
아우구스티누스도 인간의 의지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의지는 회복된 자유를 가지고 선택을 행한다. 그런데 문제는 예정론이다. 예정되지 못한 자들은 세례를 받고 새로워 졌다 할지라도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 이 예정 교리로 인하여 애굽의 수도사들간에는 적지않은 혼란이 야기 되었던 일도 있었다. 그러나 이 예정교리는 구원의 확증을 위한 내적 필요성에서 비롯된 것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요리 하려고 칼을 들었는데 칼은 위험하다고 하며 무서워 한다. 그 칼을 사용할 목적을 알지 않은채... 예정의 교리는 하나님 편에서 예정이지 사람 편에서가 아니다. 하나님의 목적에 의한 예정이다.-정길생각-)
<2>교회론
아우구스티누스의 교회관은 몇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첫째로 카톨릭 교회의 절대성을 주장하는 것이다. 사도들의 신앙과 성례와 성직을 소유하고 있는 이 교회만이 신도를 구성하고 정화 시킬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외형적인 카톨릭의 절대성이 아니라 실제 내용면에서 사도들의 신앙, 성례, 그리고 성직이 필요하다. -정길생각-)
둘째로 외적인 조직으로서의 성도들의 사귐이다. 이것을 진정한 교회에 속해 있는자로 본다. (사귐이 없으면 교인이 아닌가?-정길생각-)
세 번째로 구원받도록 예정된 자만이 참된 교회 일원으로 남는다. 이것은 그의 저서 <<신국론>>에서 나타난다.
이 세가지는 이세상의 어떤 현상이나 상태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과 세상의 백성이라는 개념을 기초로 하므로 하나님이 계수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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