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March 31, 2016

(5) 카르타고의 키프리아누스(Cypriannus of Carthago (258년 사망)

칼타고에서 출생. 그의 부모는 이교도였다. 칼타고에서 순교함.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기 전에는 유명한 수사학자였다. 그가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246년 경이었다. 몇 년 되지않은 그는 칼타고의 주교로 임명됨. (248/9) 이때 성서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 249년 데키우스 황제의 박해로 칼타고 부근에 은신 하였고 서신으로 교회를 지도 하였다. 박해시에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를 떠나 난을 피했기 때문에 박해가 그치면서 복귀문제가 대두 했다. 이때 키프리아누스는 엄격한 태도로 이에 반대하고 나섰다.(박해로 교회를 떠난이들에 대해서) 그러나 곧 그 태도는 완화되어 이교자들의 복귀를 허용 하기에 이르렀다. 이문제로 그는 노바티아누스와 논쟁을 벌였고 로마의 주교 스케파누스 1세와 또 논쟁이 있었다. 키프리아누스는 교회를 선과 악으로 이루어져 있는 인류의 구원제도라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말을 하였고 교회를 어머니로 갖고 있지 않는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가질수 없다라고 말하였고 감독을 비판하는 자는 반역이라고 하였다. 그는 유아에게도 죄가 있다고 하여 유아세례를 주장 하였다. (이하 그리스도교 대사전 p1053 참조, -기독교서회- 조선출 1972)

Wednesday, March 23, 2016

(4) 오리게네스(Origenes, Adamantius 185?-254?)
신학자, 저술가, 애굽의 알렉 산드리아에서 출생. 그는 대도시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하였고 3세기 기독교 수호자로서 활약한 중요한 인물로써 동방 기독교 사상이 발전하는데 중요한 터전을 닥았다. 부친 레오니데스는 수사학자로서 그리스도인이었다. 오리게네스는 알렉 산드리아 신학원에서 공부 했는데 클레멘스의 가르침을 받았고 특히 플라톤 주의를 배웠으며 18세에 이 학원의 원장이 되었다. 그는 스스로 금욕주의 적인 생활을 영위 하면서 마19:12-(어머니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 지어다) 을 그릇 해석한 댓가로 자신에게 거세의 형벌을 가했다. 한편 그는 아모니우스 사카스 문하에서 이교 철학과 문학을 연구했다.

오리게네스의 해석 분야는 알레고리적(풍유적) 해석이론을 발전 시켰고 표면적 의미와 영적인 의미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 하였다. 그리스도론 분야에서 오리게네스는 성부와 완전한 신성과 성자의비교적 열등한 신성을 구별하는 전통을 세웠다. 일부 학자들은 이것을 아리우스주의라고들 하였다. 오리게네스는 만물의 회복이라는 개념을 받아 들였는데 이것은 결국 인간과 사탄을 포함해 모든 피조물이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이하 신학이란? 과 그리스도교 대사전 p762 참조, -기독교서회- 조선출 1972)

Friday, March 18, 2016

(3)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nus, Quintus Septimusflorens 160-225)
서방교회의 신학자. 그는 칼타고 로마 백부장의 아들로서 출생. 처음에 법과 수사학, 그리고 희랍 고전을 배웠는데 이러한 학문은 당시 최고의 학적 수준을 대표한 것이었다. 그 후 로마의 법률가로서 명성을 떨친바 있었다.
터툴리아누스가 그리스도로 개종한 것은 아마도 195-6년 인 것 같다. 그후 칼타고로 돌아가 신부가 되었으나 주교직에는 오르지 아니했다. 젊었을 때에 그는 이교적인 사치와 방탕 그리고 향락에 빠졌으나 회심 후 에는 엄격주의자로서 처신에 신중을 기하였다. 그는 207년경 몬타노스 운동에 참가 한 탓으로 로마교회 열성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정통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는 철학에 정통 했었으나 알렉산드리아 학파처럼 철학과 그리스도교의 조화를 도모하지 않았고 끝까지 그 차이와 무관계성을 주장했다. 그리고 희랍철학은 복음의 전위도 아니며 오히려 이단의 선구라고 보았다. 북 아프리카 학파에 속하고 그 대표자 격이 터툴리아누스는 이레나에우스를 통하여 전해진 소 아시아의 전통을 강하게 영향받고 있다. 개종하기 이전에 법률가가 아니었다고 부정 하였다. 한편 그의 저서에는 스토아주의적인 흔적도 없지 않았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제를 가지고 볼 때 터툴리아누스는 다분히 사변적이기 보다는 실천적 동기에서 출발하고 있지만 그는 철학적 사고나 영지주의적 사상을 완전히 탈피하지는 못했다. 그는 이레나에우스의 주장을 이어받아 사도의 전승을 교회의 권위로 받아 들이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교회는 사도들의 전승을 보관하는 유일한 장소이며 또 사도의 계승자인 주교들은 그 전승의 관리자라고 주장한 것이다. 교부 가운데서 터툴리아누스 만큼 교회, 성서, 전승, 권위를 강조한 자도 찾아 보기 어렵지만 그의 사고방식은 역설적인 것이 많았다. 그는 신앙의 표준과 상반되는 것을 모르는 것이 곧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이다라고 하였고 나는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는 로고스의 신학을 분명히 가지고 있었다. 성부와 성자는 신적 존재인 것과 신성을 공유한 점에서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으로서의 본질도 동일하다고 하였다. 그의 그리스로론의 신성 인성 문제에서는 두 성질은 각각 다른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두 성질 사이에는 혼돈이 없고 신성과 인간성이 결합되어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그의 인간성은 신성과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을 그는 수난이라고 표현 하였다. 하나님이 진정으로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것은 몰트만에게 영향을 주었으리라고 본다 -정길생각-)
(이하 그리스도교 대사전 p1057 참조, -기독교서회- 조선출 1972)

Monday, March 14, 2016

                                                  신학이란 무엇인가? 
                                     -알리스터 맥그래스(Alister E. McGrath)-
1부 길라잡이: 시대 . 주제 . 인물로 본 기독교 신학 
                                         교부시대: 약 100년-700년 (NO 1)
                                                                                                (요약및 정리-서정길)
기독교는 자신을 유대교의 연장이자 유대교가 발전한 것이라고 보았으며, 전통적으로 유대교와 관계가 있는 지역들로 시작 될수 있다.
기독교는 기원후 1세기에 유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팔레스틴에서 번성 하였고 점차 주변으로 확산 되었는데 다소의 바울은 초기 전도자로서의 역할이 지대하였다.
1. 초기 신학 활동의 중심지들
2. 교부시대 개관
3. 주요 신학자들
(1) 순교자 유스티누스(Justinos 100-165)-
(2) 리옹의 이레나이우스(Irenaeus of Lyons 140?-200?)
교부의 한 사람으로 프랑스의 리옹에서 그의 생애를 보냈기 때문에 그를 흔히 리옹의 이레나에우스로 불리워진다. 140년경에 소아시아의 서머나에서 태어나 이곳에 성장 하였고 로마를 거쳐 프랑스의 리옹으로 간 것 같다. 여기서 신부로서 일하다가 177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박해가 있어 리옹 지방의 신도들이 보낸 사절로서 로마에 파견 되었다. 그가 리옹으로 돌아온 것은 178년이었는데 리옹의 주교로 있던 포티누스가 순교하여 그의 뒤를 이어 주교가 되었다.
당시 이교사상과의 대결은 죽음을 각오한 태세가 아니고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이레나에우스는 순교를 각오하고 이단과 사웠다. 그는 이단 논박(Adversus Haereses)이라는 책을 5권이나 저술 하였는데 주로 영지주의 이단을 논박하기 위하여 집필 되었다.
이레나에우스는 신학적으로 소 아시아 학파의 대표자 격이었다. 이 학파는 요한의 활동을 계승하여 생겨난 것이며 성서에 대한 명확한 이해와 신앙과 대내적인 회유책 그리고 이단에 대한 논쟁들이 그 특징으로 되어있다.
이레나에우스의 신학이 요한 사상에 근거를 두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지만 한편 그가 당시의 다른 어떤 신학자들 보다도 바울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도 중요하다.
이레나에우스는 처음부터 종교문제에 있어서 철학적 사변을 반대 하였다. 그는 하나님은 사색을 통해서가 아니라 계시를 통하여 우리에게 알려 진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창조 이전에 하나님이 어떠했고 무엇을 생각했느냐의 질문은 의미가 없다고 보았다. 그리고 계시의 가장 구체적인 실현이 그리스도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레나에우스의 신학은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출발 하였는데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계시라고 보았다. 그의 그리스도론은 로고스론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인격 중심이었다.
이레나에우스의 신학 전체에 있어서 근본적인 원리가 되는 것은 구원론이었다. 영지주의에 대항해서 창조의 하나님은 구속의 하나님과 동일한 존재라는 근본적인 사상을 주장한 것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계시자인 신 인간(神人間)이신 그리스도가 인간 구원의 중보자이다.
아담은 그의 자유의지를 남용하여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온 인류가 타락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 결과는 죽음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이 상실한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게 하기 위하여 네 단계의 계약을 맺었다는 것이다. 첫째는 노와와의 계약, 둘째는 아브라함과의 계약, 셋째는 모세를 통한 율법계약, 넷째는 복음 곧 그리스도를 통한 계약이라고 보았다.
그리스도는 둘째 아담으로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을 그리스도를 통하여 다시 회복하게 되었다. 이것을 이레나에우스의 반복설(recaptulation theory) 이라고 한다. 이레나에우스는 그리스도교를 변증하는 가운데서 영지주의 사상을 극력히 반박하고 나섰다. 그는 영지주의 사상을 논박할 때 성서에다 그 근거를 두고 반론을 전개하였다.
이레나에우스가 주로 문제 삼은 영지주의 사상은 정신과 물질의 이원론으로써 이론을 전개해 나가는 발렌티누스파의 선악의 이원론으로써 이론을 전개하는 마르키온 파의 주장이었다. 그들은 물질은 악하다는 전제하에서 출발하고, 그러므로 이 물질을 만든 창조주 하나님은 최선의 신이거나 최고의 신 일수 없다는 것이다. 이들은 구원이란 이 물질 세계를 완전히 탈피하여 순전히 영적인 존재로 되어 프레로마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을 위하여 특별한 지식이 필요하고 또한 자기들만이 그러한 지식을 갖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이러한 영지주의의 사상을 이레나에우스는 극력히 반대하고 성서와 전통적인 권위에 입각하여 반박 하였다.
영지주의 사상가들이 하나님을 참 신이 아니라고 한데 대하여 이레나에우스는 구약과 신약의 모든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하나님만을 참 신으로 믿었다고 고백한 것이다.
이레나에우스는 사도후 시대에 있어서 신학자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진 최초의 사상가이자 저작가로 간주 되어 있다. 제베르그는 사도시대로부터 교회에 전해진 유산을 보려면 이레나에우스의 신학이 가장 유용한 자로일 것이라고 지적한바 있었다.
<그리스도교 대사전 p 856 –기독교 서회 1972->

Sunday, March 13, 2016

신학이란 무엇인가?
-알리스터 맥그래스(Alister E. McGrath)-


1부 길라잡이: 시대 . 주제 . 인물로 본 기독교 신학
교부시대: 100-700 (NO 1)
(요약및 정리-서정길)


기독교는 자신을 유대교의 연장이자 유대교가 발전한 것이라고 보았으며, 전통적으로 유대교와 관계가 있는 지역들로 시작 될수 있다.
기독교는 기원후 1세기에 유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팔레스틴에서 번성 하였고 점차 주변으로 확산 되었는데 다소의 바울은 초기 전도자로서의 역할이 지대하였다.


1. 초기 신학 활동의 중심지들
2. 교부시대 개관
3. 주요 신학자들

(1) 순교자 유스티누스(Justinos 100-165)-신학사 공부에 제일 처음 등장된 인물
초기 그리스도교 변증철학자이며 순교자이다. 이교도인 양친을 둔 가운데 사마리아 세겜에서 출생 하였다. 그의 청년시절에 희랍의 학문과 철학을 공부하는 가운데 특히 스토아 학파, 아리스토 델레스 학파, 피다고라스 학파, 플라톤 학파들의 학설을 익히게 되었다. 그러나 어느날 유대인 그리스도인을 만나 예언자들의 사상과 예언의 내용 그리고 그 예언이 그리스도에게서 성취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를 감명깊이 듣고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를 연구하는 가운데 그리스도인으로 개종 하였다.
김의환 박사 교회사에는 유스티누스의 개종을 이렇게 기록 하였다. “어느날 그는 바닷가를 거닐고 있었는데 한 노인을 만났다. 노인을 그에게 구약 성경에 관한일과 그리스도에 이르러 예언이 성취된 사실을 말한후에 간곳이 없이 사라졌다. 여기서 그는 신구약 성경을 연구하게 되었고 기독교인이 되어 철학자의 복장으로 각처를 다니며 도를 전하고 두 번째 로마로 올라가 전도하다가 거기서 순교하였다.” - 교회사. 세종문화사 1975. 김의환 감수-
샤프는 유스티노스의 저서들은 그가 아직도 작은 종파에 불과 할때에 경멸과 핍박을 받으면서도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죽음도 달게 받던 모습을 우리에게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의 저서는 어느 것에 있어서나 그의 정직함과 열심, 그리스도교에 대한 열성적인 사랑, 조금도 두려움 없이 밖에서의 공격과 안에서의 곡해에 대하여 힘 있게 변호하였음이 여실히 나타난다. 그의 저서는 또한 공중예배와 성례 집행에 관한 신뢰 할 만한 문서로써 가장 처음으로 나온 것이다. ---만일 로마 황제들이 그들에게 보낸 이 변론을 읽었더라면 그들은 필연코 깊은 감동을 받아 적어도 유스티노스가 얼마나 정직하며 그리스도인들이 무죄 하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라고 했다.
<그리스도교 대사전 p 824 –기독교 서회 1972->
3/13/2016 페북 친구들을 위해 다시정리함

Saturday, March 5, 2016

신학이란 무엇인가?
-알리스터 맥그래스(Alister E. McGrath)-


1부 길라잡이: 시대 . 주제 . 인물로 본 기독교 신학
교부시대: 100-700 (NO 1)(요약-서정길)

기독교는 자신을 유대교의 연장이자 유대교가 발전한 것이라고 보았으며, 전통적으로 유대교와 관계가 있는 지역들로 시작 될수 있다.
기독교는 기원후 1세기에 유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팔레스틴에서 번성 하였고 점차 주변으로 확산 되었는데 다소의 바울은 초기 전도자로서의 역할이 지대하였다.

1. 초기 신학 활동의 중심지들
기독교는 1세기 말에 이르러 지중해 동쪽 지역에 널리 퍼졌고 로마제국의 수도인 로마에서도 튼튼히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당시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양쪽 교회 지도자들의 갈등으로 말미암아 로마는 서방교회로 콘스탄티노플은 동방교회로 자리를 잡아 나갔다.

(1) 이집트(그리스어 사용)- 특히 이집트에 위치한 알렉산드리아는 기독교 신학 교육의 중심지로 등장 하였고 이 도시는 오랜 세월 플라톤 전통과 접촉하였다. 흔히 알렉산드리아 학파라 일컷는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과 성서해석 분야를 중심하고 있다.(자세한 것은 이 책 310, 671-673)

(2) 터키(그리스어 사용)-안티오키아(안디옥) 와 카파도키아(갑바도기아) 지역인데 이곳은 이른 시기부터 기독교가 튼튼하게 정착 하였다. 이중 성경에 기록된 대로 안티오키아(안디옥) 는 교회 초기 역사에서 여러 차례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빠르게 기독교 사상을 이끄는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알렉산드리아와 마찬가지로 안티오키아에서도 그리스도론 및 성서해석과 관련해 독특한 방식이 발전하였다. 특히 4세기에 카파도키아 교부들로 인하여 삼위일체 교리에 큰 기여가 있었다.

(3) 아프리카 북서부(라틴어 사용)-오늘날 알제리에 위치한 지역으로써 지중해의 주요도시이다. 이곳에 기독교가 유입되던 시대에는 로마의 식민지였다. 이지역에서 활동한 주요한 사상가들로는 테르툴리아누스, 카르타고의 키프리아누스,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가 있다.

이 이외에도 지중해 지역 다른 도시들 즉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밀라노, 예루살렘 등에서도 신학적 성찰이 활발 하였다.

2. 교부시대 개관
개혁교회, 동방정교회, 로마카톨릭교회, 루터교회, 성공회 등 주류에 속하는 기독교 교회들이 교부시대를 가리켜 기독교 교리의 발전과정에 우뚝선 길잡이로 여긴다. 교파들은 각기 자기들이 초기교회의 사상가들의 견해를 계승하고 확장 했으며 나아가 필요한 경우 비판하는 일도 한다고 여긴다.

(1) 용어해설
*교부 -‘교부’ patristic 라는 말은 아버지를 뜻하는 라틴어 페테르 pater에서 유래 하였으며 초기 교회 교부들이 활동한 시대와 그 시기에 발전한 독특한 개념들을 가리킨다.
*교부시대 - 이시대는 명확하게 한정하기가 어려우며 대체로 신약성경의 기록이 끝난 약 100년경부터 칼케톤 공의회 454 년까지를 본다.
*교부신학 - 교부들에 관한 연구하는 신학 분과를 뜻하는 것이다.
*교부학 - 문자적으로는 신학 즉 하나님에 관한 연구를 뜻하지만 근래에 와서는 독자들이 교부 사상가들의 주요 개념과 그 개념들의 해석에 따르는 문제들을 손 쉽게 다룰수 있도록 해주는 교부문헌에 대한 해설서라 할수 있다.

(2) 교부시대의 신학적 의제
교부시대는 처음 유대교와 기독교와의 관계 문제였다. 그것은 할례문제와 음식규례 문제와 구약성경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들이었다.
2:28-29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그리고 교회 초기에서는 국가로부터 자주 박해를 당했으므로 신학논쟁 보다는 변증론 문제가 쟁점이었다. 초대교회 유스티누스 (Justinus Martyr 100-165) 와 같은 저술가들은 기독교의 믿음과 실천을 설명하고 옹호해야 하는 일로 적대적인 사회에 대항했었다. 또한 초기에 서방의 리옹의 이레나이우스(Irenanaeus of Lyon 130-200) 와 동방의 오리게네스(Origenes, 185-254)처럼 탁월한 신학자들이 있었으나 신학적인 논의는 교회의 박해가 끝나고 나서 부터였다.
4세기에 콘스탄티누스가 회심하고 뒤이어 로마황제가 되면서 신학 논의를 위한 분위기가 형성 되었다. 콘스탄티누스는 황제로 다스리는 동안 306-337 교회와 제국의 화해를 성공적으로 이루어냈으며 그 결과 교회는 궁지에 몰려 있다는 피해의식에서 풀려나게 되었다. 321년 콘스탄티누스는 일요일을 공휴일로 선포 하였다. 하여 신학은 교회의 비밀 회합이라는 은밀한 자리에서 벗어나 로마제국 전역에서 공적인 관심과 흥밋거리가 되었다. 결국 교부시대 후기에는 기독교 역사상 절정기로 발전하게 되었고 대규모 논쟁과 불일치 가운데서도 상당한 합의가 이루어진 시기라 할 수 있다.
(정치적 안정의 시기는 신학 연구가 활발하여 깊이있게 다루어 졌고 다 나아가 널리 펼쳐저 갔었고 정치적 압박 즉 핍박의 시기는 개인적 공동체적인 신앙의 질이 단단해 졌다고 볼수 있다.-정길생각)
다음은 교부시대를 신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어렵게 여기는 일들을 4가지로 살펴본다.
첫째/ 교부시대에 다루어진 문제들 중 적지않게 현대세계에서 부적절하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교부시대를 종교개혁시대와 비교하면서 보면 흥미를 가질수 있다.
둘째/ 교부시대에 다루어진 논쟁들은 상당부분 철학적인 개념들이기에 독자들이 그 당시 철학적 쟁점들을 어느 정도 알고 있을 때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플라톤의 대화편에 나오는 관념들을 어느정도 알고 있다고는 하나 이 관념들이 교부시대를 거치며 지중해 주변 세계에서 커다란 비판과 발전의 과정을 겪었다. 그러므로 중기 플라톤 주의와 신 플라톤 주의는 원래 플라톤 사상과 다르고 서로 간에도 다르기에 교부시대에 나온 많은 철학적 개념들이 생소해서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게 만든다. 그러나 그 논쟁들 속에서 교부들의 신학을 깊이있게 이해 할수 있다.
셋째/ 교부시대는 교리적으로도 요동치던 시대이다. 예컨대 니케야 신조’ ‘그리스도의 두 본성’ ‘정경성서등 확정한 일도 4세기에 이루어 졌기에 이 혼란들이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러기에 안정적인 이해를 넘어서서 혼란스러운 일도 보고 배우려는 자세가 있어야 한다.-정길생각-)
넷째/ 교부시대에는 언어적인 이유도 있는데 헬라어를 사용하는 동방교회와 라틴어를 사용하는 서방교회로 분열 되었으므로 동방교회 신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철학에 관심을 두면서 신학적 사변에 몰두 하였고 서방교회에서는 철학이 신학에 끼어드는 것을 반대하고 오직 성서속에 나타난 교회들을 탐구하는 것으로만 여겼다.

(여기에서 비교 탐구하여 성경의 기본입장과 복음의 이해와 선교를 위한 방편으로 구분하면서 두루 살펴볼 필요가 있다-정길생각)
-3/4/2016 Wycliffe University 서정길 강의록에서 카피해 옴- 
<사진/ 경기도 수원, 수원성 교회>